Januar

2022년 1월호

 

여러분 안녕하세요. 2017년 정유년이 지나 2018년 무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2017년은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단순히 숫자 1이 더해지는 것뿐인데 왜이렇게 기분이 싱숭생숭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새해 들어 늘어나는 나이 1이라는 값어치는 과연 어떤 무게로 다가올까요. 그 무게에 짓눌리진 않을지 속 없는 걱정만 늘어갑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저는 새해 첫날을 일본에서 보냈습니다. 별다를 리 없는 평범한 아침이었지만, 타국에서 맞이하는 새해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오더군요. 설레는 아침. 여행지에서 느끼는 그 특별한 감정으로 해야 할 일을 머리로 곱씹으며 올 한해가 이렇게 부지런하게 시작되고 끝이 나길 속으로 바랐습니다. 여러분들도 첫날 품었던 생각들이 있으시지요. 올 한해도 그 마음 그대로 보내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럼 2018년 첫 여행기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 바르셀로나 대성당 – 그런 사람이었음을

 

 

다음날 아침, 마드리드를 떠나 바르셀로나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바르셀로나 대성당이었습니다. 1448년에 완공된 이 성당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역시 성당 내부는 차분한 노란 조명이 채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밝은 곳에 십자가가 보입니다. 꼭 마주 잡은 두 손과 십자가를 향한 눈에는 짙은 진지함과 경건함이 서려 있습니다. 이내 눈을 감은 그들의 모습에선 고독함이 스칩니다. 그리고 한줄기 희박한 가능성에 몸을 던져버린 것만 같은 위태위태함이 드리워집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요. 어떤 아픔이 그들을 여기까지 인도한 것일까요. 한낱 관광객이 그 마음을 헤아릴 수나 있을까요.

 

힘들어하는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는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고 느껴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가진 슬픔, 고통을 반만이라도 뚝 떼어 내가 가져갈 수 있었다면 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조금 덜 힘들었을 텐데. 차라리 내가 조금 더 아프고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하나 이기적 이게도 이 무거운 마음이, 내가 너를 생각하고 있다는 그 알량한 선의의 표시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아 서운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이렇게 너를 생각하는데 어떻게 표현이 되지 않을 때,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가 없어서 나는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은 나에게. 우리 관계는 고작 이것뿐이었던 건가? 하며 말이죠.

 

가끔 공감보다 걱정이 앞설 때가 있었습니다. 너무 막연해서,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슬픔에 그들이 직면했을 때. 머릿속이 깜깜해졌습니다. 같이 슬퍼해줘야 할 텐데 왜 나는 그저 멍해지나. 이런 생각이 가슴 아닌 머리를 스쳤습니다. 그리고 무서웠습니다. 마음속의 무언가가 고장 나서 공감 능력이 결여된 것은 아닌 걸까 하고요. 고작 영화 한 편의 결말에, 좋아하는 가수의 가사 몇 글자에 그렇게 흔들리면서 어떻게 생생히 겪고 있는 현실에선 이렇게 무딜 수 있는지.

 

그날 이후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이럴 땐, 그 사람을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겪어서 슬픈 것이 아닌 네가 슬프다는 그 사실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좀 나아지더군요. 함께 슬퍼하며 아파할 수 있어서 말이죠. 그러면 마음의 짐이 조금이라도 줄어듭니다. 그리고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허나 동시에 단점이 하나 생겼습니다. 내 사람이 아님에도 쉽게 흔들리며, 주변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마음이 가고 연민이 생깁니다. 이전의 나보다 많이 약해지고 말랑해졌습니다. 주변 사람 모두가 아니라 할 때 괜히 더 신경이 쓰이고 손을 뻗고 싶어 집니다. 그리고 가끔 이런 마음이 새로운 갈등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마음을 쏟다가 정작 내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때도 있으니까요. 이 자리를 빌려 이해를 바라고 싶습니다. 이런 사람이라 그랬음을.



● 보케리아 시장의 그녀 – 관계에 관하여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나와 보케리아 시장을 방문했습니다. 이곳 역시 활기가 넘칩니다. 산미구엘 시장에서 느꼈던 그 북적거림과 소란스러움이 이곳에서도 계속됩니다. 보케리아 시장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5유로의 저렴한 생과일주스입니다. 시장 구석구석 알록달록한 과일들이 시선을 잡아챕니다. 채도가 매우 높은 선명한 과일들의 색감은 별로 목이 마르지도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먹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했습니다. 또 선택 장애에 빠집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사실 생과일주스가 거기서 거기일 텐데 말이죠.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팁. 입구 쪽은 비싸니 시장 내부에서 고르라는 어떤 블로거의 말을 충실히 따라 안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무수히 많은 생과일주스 점포 중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본능적으로 민소매의 살에 시선이 가더군요. 보일 듯 말 듯 살짝 드러난 타투가 매력적이었습니다. 이후 두 명의 의견이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별다른 고민 없이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이럴 때는 선택 장애가 말끔히 해소됩니다. 역시 남자들이라 그런걸까요. 괜한 미소와 함께 평소보다 목소리를 한껏 낮춰 주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분, 매우 사무적입니다. 딱딱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과일 주스 중 우리가 주문한 것을 집어 건넸습니다. 눈앞에서 바로 과일을 갈아줄 줄 알았는데. 뭔가 속은 기분입니다. 아주 잠시 동안 저 홀로 상상했던 로맨스는 단숨에 끝이 났고, 애초에 아무 의도 없었다는 듯 무심히 생과일 주스를 들고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구석으로 이동했습니다. 한 모금을 들이켜봅니다. 인위적인 달콤함과 시원함이 뇌를 찌릿하게 관통합니다. 딱 1.5유로만큼의 행복함이 입안을 가득 채웁니다. 단박에 알아챘습니다. 과일 간 것에 설탕 비스름한 뭔가가 섞여있다고 말이죠. 단 것을 싫어하는 저로선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체 왜 유명한 건지. 편의점에서 산 음료와 별다를 것 없더군요.

 

아마 여행 후기를 남기는 사람 대부분이 최소의 예산으로 장기간의 유럽 여행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매우 주관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시장에 왔으면 뭔가를 먹어봐야 하긴 하는데 술은 비싸고, 타파스를 먹자니 그 돈으로 저녁 식사를 근사하게 먹는 게 나을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관계 성립이라 하고 싶습니다. 비록 1.5유로의 생과일주스 하나라지만 그 매개체를 통해 보케리아 시장과 나와는 좀 더 특별한 관계가 성립되니까요. 그저 지나갔더라면 남지 않았을 기억들. 1.5유로의 교환을 통해 얻었던 그날의 비록 사소한 경험이 관계라는 끈이 되어 유의미해지니까 말이죠. 현실로 돌아와선 문득 떠오르는 소중한 그리움으로 변하니까요.

요즘도 쥬씨를 보면 보케리아 시장이, 그 여인이 가끔 떠오릅니다.



● 바르셀로나네타 해변 – 20살의 여름바다

 

 

바르셀로네타 해변을 찾았습니다. 정박해있는 수많은 요트들을 지나갑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과 바다가 눈에 들어옵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바다입니다. 손을 뻗어 모래 한 줌을 손으로 흩날려봅니다. 고운 모래 입자의 느낌이 참 좋습니다. 모래사장 중간으로 다가갔습니다. 바다를, 그리고 사람들을 찬찬히 훑기 시작했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아 생각보다 바다가 맑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원래 맑지 않은 바다인데 유럽 바다는 다를 것이라는 멍청한 기대였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로 발이라도 담가볼까 하는 생각은 이내 잊고 모래사장을 따라 천천히 걸었습니다.

 

볼거리는 많았습니다. 비키니를 입은 여성분들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탄성을 지르기도 하고, 울룩불룩한 근육을 가진 현지 남성들의 모습에 괜히 위축되기도 했습니다. 여름 바다의 재미가 늘 그렇듯 말이죠. 확실히 날이 맑지 않으니 몸도 축축 처집니다. 더 이상 걷는 것을 포기하고 모래밭 한가운데 주저앉았습니다. 그냥 이렇게 있을까 하다,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꽤나 시간이 남아서 해변가에 위치한 작은 주점에 들어갔습니다. 샹그리아 피처 하나를 시키고 천천히 해변을 곱씹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바다가 언제였는지. 20살에 갔던 경포대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친구 8명과 함께 한. 다시 회상하게 된 그날의 모습은 웃음도 나지 않을 만큼 참혹했습니다. 이상한 장발 곱슬머리 하며 큼직한 피어싱에, 집에 누워있다 담배 사러 잠시 밖에 나온 것만 같은 옷차림까지. 어떻게 한번 여자들과 놀아보겠다고 푹푹 찌는 한여름에 긴팔셔츠를 입고, 서로 머리를 만져주며 괜찮다고 파이팅을 외치던 20살의 여름바다 말이죠. 당연히 잘 될 리가 없었습니다. 8명이라는 인원수는 둘째 치고라도, 몰골이 끔찍했으니까요. 지금 친구들을 보면 앞의 20년보다 뒤의 9년 동안 참 잘 자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저희도 뭐 애초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누구처럼 한번 놀아봤다. 이런 얘기를 떠벌리고 싶었던 겁니다. 20대 초반 남자들 특유의 허세 비슷한 것이죠. 뭐 잠깐이라도 난생처음 보는 이성과 술 한잔한다면 그 이야기에 살이 붙고 붙어, 으쓱하며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까요. 같이 술 마신 이야기가 1이라면 붙는 이야기가 9입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좀 달라져 보일까요. 아니 달라졌을까요? 외적으론 이젠 더 이상 이상한 머리를 할 수 없는 직장인이 되었고, 피어싱은 6년 전에 마지막으로 끼었던 것 같습니다. 살이 좀 붙었고 최소한 사람같이 옷을 입고 다닙니다. 물론 이것은 오로지 제 생각일 뿐입니다. 그걸 제외하면 아직 그때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괜스레 바다에 오면 설레고, 누군가와 눈빛만 마주쳐도 설마 하는 혼자만의 기대감을 갖는. 여전히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 걸기 쑥스럽고, 혹여 누군가와 말이라도 섞게 된다면 동네에 돌아가 부풀어질 대로 부풀어진 이야기를 할 것만 같은. 아무 일이 없더라도 크게 상심하지 않으며,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모든 급 만남에 실패하고 터벅터벅 돌아와 소주를 먹던 경포대의 그날과, 지금 바르셀로나 해변에서 샹그리아를 먹는 제 모습이 데칼코마니처럼 포개집니다. 눈앞에서 손사래를 치는 여자와 끈질기게 말을 거는 어떤 남자를 보고 그때 생각에 한참을 히죽히죽거렸습니다.

 

여행기는 잘 보셨는지요. 여행기를 쓰다 보면 아직도 그 때가 그리워집니다. 그 때의 나이가 아니라 그 때의 감정, 기분, 행복함 등이죠. 올해도 한번 그런 좋은 추억을 만들어 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럼 다음 여행기로 찾아 뵙겠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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