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여러분 안녕하세요. 봄이라는 계절이 찾아왔음을 물씬 느낄 수 있는 5월 입니다. 날이 풀릴수록 몸은 가벼워지고, 온 세상을 도보로 돌아다니고 싶을 정도로 자꾸 겉돌고 싶은 요즘입니다. 유독 쉬는 날도 많고, 행사도 많은 5월. 잘 보내고 계신지요. 춘곤증에 시달리며 업무를 하다가도, 빨간 날을 보며 위안을 삼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휴가가 그리워지는 요즘인데요 어느덧 7월~8월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2달여 입니다. 슬슬 여름 휴가지를 생각해야 겠죠? 혹시 유럽은 어떠신가요? 그 유럽 이야기, 계속해서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슬픈 녹음의 베르사유 정원
궁전 뒤편의 정원으로 이동했다. 실눈을 뜨고서야 윤곽이 잡히는 끝없이 펼쳐진 녹음과 대지. 그리고 그 너머의 대운하와 분수대까지. 아름다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정원의 크기에 놀랍니다. 궁전의 호화스러움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의 충격적인 규모. 한갓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혀를 내두를 정도의 행위밖에는 없습니다.
망부석처럼 서 있던 것도 잠시, 정원의 면면을 살피러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실내와는 확연히 다른 바깥의 공기. 하나, 상쾌한 공기를 얻은 대신 작열하는 태양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습니다. 살이 그을리는 것이 싫어 버티고 버티다, 결국 셔츠를 벗고 허리에 두릅니다. 피부에 느껴지는 따끔함이 여행의 흔적으로 남을 것에 걱정이 되긴 했지만, 땀이 줄줄 흐르는 것보단 한결 낫습니다.
봄의 향이 물씬 풍기는, 알록달록한 꽃이 만발한 화단을 지납니다. 정원 중심부로 깊숙이 이동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미스터리 서클과 같은 기하학적인 문양에 아기자기한 나무가 있는 왼편의 작은 정원입니다. 뒤로는 큰 호수와, 우거진 수풀을 끼고 있는 장관도 물론 인상적이지만, 일정한 간격의 화분마다 촘촘히 심어진 허리 높이만큼의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다 조립된 레고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쓴 각본 속에는, 무대 뒤편 보이지 않는 손들의 정성과 노고가 진하게 배어있습니다.
이제 여유 있는 산책의 시작입니다. 십자 모양의 운하가 내려다보이는 분수대의 계단을 내려간다. 세모, 네모로 정갈하게 깎인 나무를 지나 미로처럼 공간을 구분을 해놓은 수풀 벽과 마주합니다. 포장지를 벗겨낸 직사각형의 파래김을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새인 것이, 여간 이국적인 게 아닙니다. 그렇게 정원의 내부는 패턴만 다를 뿐 이런 수풀 벽과 호수와 운하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순리로 이루어진 대자연이 아닌 인간이 창조한 거대한 피조물은 규칙성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맞닥뜨립니다. 인위적인 느낌의 연속과 반복의 그 지루함은, 충분히 강렬한 아름다움임에도 매력을 잃어갑니다. 이것이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이 신의 정원이라 불릴 수 없는 이유겠습니다. 정원 내부로 들어갈수록 직선을 따라 일정하게 쳐낸 가지들을 보며 점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가혹하게도 그것들의 색은 유독 진합니다.
살을 깎고 깎아도 뿜어내는 그들의 진한 녹색의 생명력. 생의 반을 잃은 생명에 생명력을 느끼다니. 이것이야말로 자연이 가지고 있는 위대함이 아닐까요. 공연스레 깊이 숨을 들이마셔 봅니다. 제초했을 때의 그 비명과 같은 향이 올라오는 듯합니다.
이 찝찝한 기운이 가시지 않아, 걸음을 멈추고 구글맵을 켰습니다. 아직 더 보여줄 것이 남았다고 걸음을 재촉하는 베르사유 정원 약도. 그러나 이젠 이것이 썩 달갑지 않습니다. 그렇게 베르사유 정원을 빠져 나왔습니다. 크게 아쉽지는 않았습니다. 어차피 지금 감정보다 더 큰 무언가는 채울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말이죠.
후에 프랑스를 다시 찾는다고 했을 때, 이곳은 가장 이 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장소일 것 같습니다. 과연 그것이 마냥 반가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 아드리아나, 당신이 여기 살면 여기가 현실이 되는 거예요.그럼 당신은 또 다른 세계를 동경하게 돼요. 진짜 황금시기를요.현실은 그런 거예요. 항상 불만족스럽죠. 인생은 그런 거니까요.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中
오페라 가르니에. 시간적인 이유로 이번 여행에서 어쩔 수 없이 제외했던 일정. 혼자 돌아다닌 덕에 한결 여유로워진 시간. 그 시간을 활용해 오페라 가르니에를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여행 일정이 담긴 엑셀을 닫고 구글 맵에 오페라 역을 검색합니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파리의 지하철. 이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역에 도착해서 문이 열리지 않아 당황하는 관광객을 발견하곤 능숙하게 수동 문을 열어주며 마치 현지인인 양 어깨를 으쓱해 봅니다.
오페라 역 출구를 나오자마자 이 건물이다 싶었습니다. 파리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을 자랑한다는 명성에 맞게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외부가 인상적입니다. 당연하게 내부에 대한 기대치도 상승합니다. 바로 안으로 들어갑니다.
금빛 조각과, 동상들. 그리고 천장화, 대리석 계단. 익숙한 느낌의 반복. 베르사유 궁전을 보고 와서일까요.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오페라 가르니에. 기대가 많았지만, 그저 나에게는 베르사유 궁전의 연장선상이자 아류작으로만 보였을 뿐이었습니다.
텁텁한 뒷맛이랄까요. 베르사유에서 느꼈던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잔상이 되어 남아있던 탓도 있겠습니다. 가장 좋았던 것은 오로지 처음 출구를 나와 바라본 오페라 역의 분위기였습니다. 밖으로 나와 역 주변을 돌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차라리 이것이 더욱 맘에 들었습니다.
조금이나마 이곳이 익숙해진 걸까요. 두 가지의 익숙함. 가까워지는 익숙함과 멀어지는 익숙함. 불편과 설렘이라는 두 가지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한 익숙함. 나를 편안하게도 하고 무기력하게도 만드는 익숙함. 시작과 끝이 확연히 다른, 서로를 교차하는 이 익숙함.
익숙해지는 것은 어려웠고, 익숙해진다는 것은 지겨웠습니다. 익숙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하다가도 유습한 상태에 이르러 안일한 생활을 하다 보면 다시 또 정체에 대한 염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익숙함을 부정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반복된 삶을 살아야 하는 보통 사람의 입장에선 꽤나 성가신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오로지 새로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선택한 것은 여행이었습니다. 새로움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여행.
그런데 이곳에서도 겨우 찰나의 반복에 염증을 느끼다니요. 마침 오랜 유학생활을 했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거기도 처음에만 좋아. 나중엔 똑같더라고” 당시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친구의 말에 이제 와서야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쩌면 대부분에게 있어 인생은 그런 것이었고,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나 봅니다. 현실의 익숙함과 밀고 당기기. 그러다 지치면 현실을 불평하고 투덜거리고, 다른 세계를 끝없이 동경하고. 그 생각이 들자 괜히 시큰해졌습니다. 저 역시도 남들과 똑같이 너무 많이 놓치고 사는 것 같아서요.
익숙함에 대한 반감은 어떻게 보면 긍정적인 일이었습니다. 끝없이 벗어나고자 했던 욕구가 벌써 몇 번의 여행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또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까요. 이것은 제 삶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어떤 성질이었습니다. 나를 앞으로 더욱 나아가게 하고, 끝없이 탐구하게 하는. 그리고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게 하는, 새로움에 대한 끝없는 동경과 갈망이죠.
하나, 생각해보면 이는 그토록 익숙한 과거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출근과 퇴근. 의미 없이 뒤적거리다 발견한 사진 몇 장. 술자리에서 나온 누군가의 경험담들. 반복된 일상에서 튀어나온 소소하게 특별한 이야기들. 저에게 동경은 회상을 기반으로 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점차 새로운 여행지를 물색하는 시간보다, 다녀온 곳의 사진을 넘기며 추억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정체에 대한 염증은 혹시 향수가 아니었을까요. 그때만큼의 행복함을 얻기 위한 발버둥. 환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은 잠시이지만, 그것을 기억할 시간은 평생이니까요.
당연한 삶. 되풀이되는 하루.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익숙한 이야기들. 어느 날 문득 슬며시 다가와 나를 웃음 짓게 하는 기억들.
그 이야기는 특별히 기억나는 것일 뿐, 이미 익숙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동경이라는 이름으로 쓰일 삶을 헛된 투정에 허비하고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술 마신 다음날, 술자리에서의 즐거움은 잊고 현실의 숙취로 끙끙거림만 기억하는 이치랄까요. 그 기억은 미래에서 꺼내 볼 지금 저의 익숙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제가 그리워할 것은 끊임없이 투덜거렸던 오늘의 익숙함입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저에게. 그리고 이곳을 기억할 미래의 저에게. 이 아름다움의 색이 생소해질 무렵, 하늘을 가린 흰색의 아파트에 염증을 느낄 즈음 난 다시 이곳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오늘도 손쉽게 지나치는 익숙하리만큼 익숙한 지금을 말이죠.
여행기는 잘 보셨는지요. 다음 호에는 휴가기간이겠지요. 다들 새롭고, 즐거운 곳으로 휴가가실 수 있도록 지금부터 계획 잘 세우시길 바랍니다. 혹여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다음주는 더욱 즐거운 이야기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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