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

2022년 1월호

 

여러분 안녕하세요. 무더위에 남은 날들이 겁이 나면서도 어서 가을이 오길 바라는 중간 정도의 마음이 드는 요즘입니다. 새로움이 시작되는 9월. 짙어져 가는 옷과 하늘을 보며 설렘이 많아집니다. 그 동안 현장과 사무실에서 다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다들 여름 휴가들은 잘 다녀오셨는지요. 저는 사정상 뒤로 미뤄진 휴가를 기다리며 하루 하루를 버티는 중이랍니다. 그 기대감을 안고 여행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몽마르트의 동행Ⅱ

 

 

올라가기 전과 내려온 후를 비교해 보자면 우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꽤나 친해져 있었습니다. 파리의 분위기 때문이었을까요. 타지에서 만난 한국 사람에 대한 반가움 때문이었을까요. 혹은 낯선 사람을 알아가는 재미 때문이었을까요. 이제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고, 제는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이대로 헤어지기엔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어중간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일정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피라미드 야경을 보고 친구를 만나 바토무슈를 탈 예정이었기 때문이죠. 이미 그것만으로도 빠듯한 시간이었고, 마음과는 반대로 파리의 밤은 속절없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루브르 박물관을 포기했습니다. 일정이 틀어지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저이지만, 그냥 그렇게 했습니다. 첫인상이 까칠한 저 같은 사람을 잘 받아준 것에 대한 고마움일 수도 있으며, 제 여행의 추억 속에 사람이라는 기억이 상대적으로 무척 적었던 것도 한몫 했을 것입니다.

 

우리 셋은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이미 둘은 저녁을 먹기로 되어 있었고, 제가 그 자리에 슬며시 끼어든 정도이긴 하지만요. 잠시나마, 혹시 제가 로맨틱한 기류에 눈치 없이 훼방을 놓는 건가 걱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미리 찾아놓은 음식점이 있는 듯했는데, 정말 괜찮은 곳이 있다며 제 일정 속에 있는 음식점으로 반강제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저도 가본 적이 없는 음식점이자, 파리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던 친구의 단골 음식점으로 말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약간 미안하기도 합니다.

 

바로 계단으로 내려가려는 그들을 급히 불러 세웠습니다. "이쪽으로 내려가는 게 어때요? 볼 거 많은데." 어리둥절한 표정의 그들을 데리고 간 곳은 몽마르뜨 뒷길의 예술가의 거리였습니다.

 

그 둘은 몽마르뜨 외에는 이곳에서의 계획이 전무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이 주변에 빠삭했던 저는 그때부터 졸지에 가이드가 됐습니다. “이곳은 테르트르 광장이예요. 예술가의 거리라고 불려요. 바가지가 많다고 하네요.”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광장을 바라봤습니다. 노천카페 사이사이로 열심히 붓질을 하고 있는 앙다문 입술의 화가들을. 그리고 반대편에서 꽤나 밝은 미소로 그림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그 뒷 배경으로 간간이 들어온 노랗고 둥근 조명들은 파리만의 분위기를 충분히 무르익게 했습니다. 예상치 않게 파리의 명소를 낯선 이 덕분에 발견하다니. 그들에게도 좋은 일이었으며 저에게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내심 기뻤습니다. 

 

“여기는 사랑해 벽이에요.” 다음으로 도착한 목적지는 ‘쥬뗌므 벽.’ 일명 ‘사랑해 벽.’ 화장실 벽을 연상하게끔 하는 파란색의 타일 벽에 화이트로 대충 흘려 쓴 것 같은 글자들. 그 글자들 하나하나는 ‘사랑해.’라는 공통 의미를 갖고, 각자의 다양한 언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쉽게도 우리는 멀리서 보아야만 했습니다. 늦게 도착한 죄로 사랑해 벽이 있는 공원 입구가 닫혀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벽 앞에 있을 연인들의 핑크빛 세례를 두 눈으로 목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좋았습니다.

 

저 멀리 있는 벽을 카메라 줌으로 당겨보며 한글을 찾았습니다. 급격히 말수가 줄어든 우리. 글자 찾기와 더불어 우리 각자는 누군가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사랑해.’ ‘나 너 사랑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말들. 파리에서 한글이라니. 이렇게 보니 또 정겹습니다. 그리고 정자로 쓰여 있지 않아 더욱 정겹습니다. 누군가의 연애편지에, 누군가의 일기장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마음 한쪽을 꾹꾹 눌러 담은 그 손 떨림의 글씨 같아서입니다. 이것을 만든 작가도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지레짐작해봅니다. 



● 파리에서 만난 한국사람 - '몽마르뜨'에서의 동행 Ⅲ

 

 

이제 정말로, 드디어 밥을 먹으러 갑니다. 친구와의 약속은 10시 10분인데, 벌써 오후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간입니다. 애써 침착하며, 티 나지 않게 서둘러야 했습니다. 우리가 찾는 식당은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사랑해 벽’에서 도보로 5분 정도의 거리. 식당의 이름은 ‘Le BON Bock’ 입니다.

 

입구의 빨간 간판을 바라봅니다. 1879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이 가게. 평소 오랜 역사를 가진 식당은 그들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저로서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내부로 들어갔습니다. 작은 규모의 식당입니다. 아늑한 노란 조명과 원목 재질의 7~8개의 테이블.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이 프랑스 식당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서 피어 오르는 오랜 시간의 흔적이 어렴풋하게 보입니다. 이미 자리는 거의 만석이었고 오직 한 테이블만이 남아있었습니다.

 

메뉴판이 나오자 다들 멀뚱멀뚱한 눈입니다. 눈치껏 가장 먼저 오늘의 메뉴를 골랐습니다. 역시나 나머지 두 명도 오늘의 메뉴를 고릅니다. 스페인 식당의 ‘메뉴 델 리아’라는 시스템을 수없이 봐서 익숙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애피타이저, 메인 디쉬, 디저트로 구성된 오늘의 메뉴 중 우리는 각자 선호하는 것들로 주문을 완료했습니다. 물론, 같이 마실 와인까지요.

 

식사가 시작됩니다. 저에게는 오늘 첫 식사입니다. 다행히 음식은 정말 맛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도 호평 일색입니다. 프랑스에 와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라는 여성분과, 식사 다운 식사는 처음이라는 남자분. 별거 아닌 칭찬에 저는 또 으쓱합니다.

 

저는 평소 정말 친한 사람이 생기면 여기저기에 숨은 보석 같은 맛집을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는 그 반응을 살핍니다. 평소 맛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고 까다로운 탓에 실패한 경험은 거의 없지만, 늘 긴장이 됩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그 음식이 바로 나온 직후의 순간. 그리고 그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이런 식으로 저는 그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성격이 그렇습니다. 평소에 자주 전하지 못한 마음을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행위를 통해 전달합니다. 그렇게라도 전달하고서야 마음이 흡족합니다. 늘 그렇게 꼭 돌려서 말합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그들에게 그런 식으로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음식을 먹어보며, 와인 몇 잔을 나누며 우린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직장인들은 직장인 나름의 고충을 털어놓으며 신나게 회사 욕을 했습니다. 유학생은 또 학생이 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들을 푸념했습니다. 이야기를 할수록, 우리의 지친 마음들은 비단 각자의 몫만은 아니었습니다. 모두 다 그저 길 위를 걸어가는 고만고만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단지 나만 아무 일 없이 잘 산다는 말로 누군가에게 시기와 질투를 유발하거나 상대적 박탈감을 줄 수 있기에 경계한 겸손인지, 혹은 반대로 너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위로를 건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한숨과 함께, 남은 와인은 자꾸만 줄어갔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기에는 배경이 너무 아까워, 우린 현실 이야기를 접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현실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바로 이곳에 있는 것. 파리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찾은 공통점으로는 세 명 모두 지금 이곳에서의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내 사그라진 고민과 걱정들. 같은 고민을 안고 살더라도, 어디에서 그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그 농도는 짙어질 수도 묽어질 수도 있나 봅니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10시. 이제 막 디저트가 나왔을 때, 저는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해야만 했습니다. 먼저 떠나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자리의 흥을 깨는 송구함에 맞서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꽤나 고전적인 수법을 썼습니다. 화장실을 다녀온다 하고 계산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리에 돌아온 순간 바로 짐을 챙기며 말을 했습니다. 먼저 나가보겠다고. 식사 전부터 약속이 있다고 넌지시 이야기를 던졌기에 그들은 크게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계산했어요” 그들은 이 말에 놀랐습니다.

 

얼마가 나왔냐는 말에 아니라고, 그냥 괜찮다고 대충 얼버무렸습니다. 수많은 여행 중에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고. 좋은 사람들 만나서 좋은 식사를 하고 좋은 구경을 했다며 흘려 말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지막 성의 표시였습니다. 디저트로 나온 크림 브륄레를 한입 크게 퍼먹고 서둘러 일어섰습니다. 우물거리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려 하는 순간, 그들은 연락처 교환을 제안했습니다. 우린 카카오톡 아이디 교환을 했습니다. 언젠가 만날 기약을 하며. 그리고 꼭 연락하고 지내자는 말과 함께.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을 함께한 것에 비해 우리의 헤어짐은 너무나 신속했고 냉정했습니다. 그렇지만, 누가 먼저 안녕을 이야기할지. 누가 먼저 돌아 설지로 서로 눈치 보며 쭈뼛 거리는 그런 질척한 안녕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그렇게 그 둘을 남겨놓고 가게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친구가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여행기는 잘 보셨는지요. 다음 호엔 끝으로 치닫는 유럽 여행기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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